■ 활동명 : 이화경의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 일 시 : 2025년 2월3일(월) 16:00 ~ 20:00
■ 장 소 : 평창동 카페블레싱 ■ 참가자 : 강성자 대표 외 회원 5명
이화경 작가를, 그녀의 작품을 소개해준 삐삐님(2월 도서를 선정)에게 감동의 박수를 보내며....팀원들은 밴드에 소감문을 올렸다.
삐삐님이 생각해오라고 한 토론 주제로 2월 풍경의 꽃은 향기롭게 피어났다. (삐삐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화경의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로 나누고픈 이야기.
1. 이 단편선에 대한 전체 평가
2. 여덟 개의 단편 가운데 원픽을 하자면? 그 이유는?
3. 내가 꼽은 문장 2~3개
[노라의 뽄]으로 얘기합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 자살은 정사(情死)로 미화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 뒤에 있던 인물, 김우진의 아내의 서사를 만들어간 이 단편처럼
누군가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인물 가운데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요?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로 얘기합니다.
지독한 사랑의 주인공들 엄마와 아버지, 아버지의 옛 애인이 등장하죠.
만약 나라면 옛 애인과 보낼 3년의 시간을 달라는 남자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노라의 뽄
드라마 사의 찬미
신혜선, 이종석을 서방님이라 호칭하는 여인 앞 ‘멘탈 붕괴’@《He Hymn Of Death》사의찬미 EP02[He Hymn Of Death|사의찬미] 182303 SBS신혜선(윤심덕)은 동우회 사람들과 함께 간 이종석(김우진)의 집에서 이종석을 서방님이라 호칭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이 무너진다.☞ 'He Hymn Of Death' official website : https://progr...www.youtube.com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 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개여울 / 김 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앵혈, 꾀꼬리의 피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 작자 미상
1절
만둣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랍인 또는 몽골인) 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심부름하는 아이)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난잡한(음탕한) 곳 없다.
• 만둣집에 만두를 사러 갔더니 상점주인 아랍인이 손을 잡고 유혹하더라. 소문내지 말라고 가게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위협하지만,
결국 소문은 퍼지고 여자들이 만둣집 사장과 잠자리를 하겠다며 달려오니 그곳만큼 난잡한 곳이 없었다.
2절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주지 스님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난잡한 곳 없다.
• 절에 갔더니 이번에는 주지 스님이 유혹한다. 스님과 자고나서 상좌승의 입을 막아보려 하지만, 소문은 퍼지고,
스님과 잠자리를 하겠다며 여자들이 몰려
3절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난잡한 곳 없다.
• 우물가에 물을 길러 갔는데 용(고려 왕족)을 만나 정을 통하게 된다. 쉬쉬해보지만 소문이 나자 여자들이 몰려온다.
4절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술 바가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난잡한 곳 없다.
• 술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 이번에는 술집 사장이 수작을 건다. 역시나 소문이 퍼지자 여자들이 나도 하겠다며 달려오니 난잡한 관계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당대 문란했던 고려 사회의 분위기를 풍자한 것이다. 외국인, 승려, 왕족, 술집 사장까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이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나도 하겠다며 달려오는 광경은 해학적이다. 사회 풍자 가요지만 조선과 달리 성문화가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이던 고려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토끼 카레
오감도(烏瞰圖) 시제1호 / 이 상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2025년 02월 03일 책 읽는 풍경_엘리
도서 :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2023년) by 이화경(1964년생)
들어가는 말
정지아(1965년생)의 <해방일지>가 겹쳐진다.
입담이 거침없다. 작가의 어휘들이 낯설다. 남도의 사투리가 들쭉날쭉하다.
“나 또한 내게로 온 것들을 기꺼이 글로 일러바치고자 들뜬 몸종이었음을 고백한다. 바라건대, 오래오래 떠벌리다 가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 나오는 대목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이해가 되었다.
2015년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
2021년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2023년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세 단편만 해도 다양한 문제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알코올중독자, 우울증으로 자살한사람, 지적장애인(7세 지능을 가진 여자), 개인 파산자, 파출부,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남자, 이혼과 사별을 겪고 난 후 혼자 아이 셋을 키우는 여자, 한 남자에 정착하지 못하는 여자...
작가 이화경은 이들의 이야기를 msg 없이 담백한 토종의 맛이 나도록 잘 버무려 내놓았다.
작가는 ‘들뜬 몸종’으로서 ‘내게로 온 것들을 기꺼이 글로 일러바치고’있는 중이다.
먼 시대를 건너간 상상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은 마을 공공체가 우물에서 물을 길러 가고 빨래를 하는 시대에 일어난 이야기를, 는 ‘마부가 모는 말이 도시의 도로에서 수레를 끌고 다니던 풍경이 나오는 시대’가 나오기도 한다. 1997년 IMF, 1998년 금강산 관광 시작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는 앞의 두 단편보다는 시기적으로 좀 더 가깝다.
1.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2021년)
‘자신의 여자가 떠날까 봐 한수가 불안해하듯, 한수의 여자는 한수가 자신에게 전전긍긍해하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듯, 영희는 한수와 한수의 여자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않을까 봐 불안했다.’ (p.89)
*전이적 애증의 수수께끼
글쓰기 수업 강사 영희에게는 알코올중독자 오빠, 한스가 있고 한스의 여자가 있다. 영희의 애인인 성호는 10년간 복용하던 우울증약을 끊고, 두 달 뒤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빠 한수는 알코올중독으로 수시로 폐쇄병동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이 반복되는 과정엔 입원은 동생 영희가, 퇴원은 아내의 역할이 있다. ‘입원은 영희가 시키고 퇴원은 한수의 여자가 허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한수의 여자는 입원이 필요한 상황에 닥칠 때마다 ‘도움이 필요해요.’라든가, ‘한수의마른 주정이 시작되었어요.’라는 문자를 영희에게 보내고, 영희는 널브러진 오빠 한스를 수습해서 병원에 입원시킨다.
‘한수는 대인기피증이 있고, 특히 어린아이나 강아지를 잘 쳐다보지 못한다. 한수는 끝없이 외롭다고 되뇌며, 쓸쓸하다고 중얼거리며, 허무하다고 비명을 지른다. 한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오만함으로 무장하고, 관계에서 다치지 않기 위해 상대의 의사완 관계없이 선물과 돈을 일방적으로 퍼붓는다. 돈을 퍼붓기 위해 주식에 매달리는 것이다.’
한수는 50 년 전에 아버지에게 당한 병아리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오십 년 후에 자신을 알코올중독자로 만들었노라고 말한다.
그런 한수에게도 영희가 부러워하는, 갖고 싶어 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한수의 말이다.
‘한수의 말에는 사람을 설득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한수의 말은 자신의 지긋지긋한 중독조차도 매력적으로 위장했다. 한수의 저 도저한 자멸성의 언어들은 건강과 위생과 생명 같은 언어들을 피상적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삶의 실질적인 유용성을 목숨이나 겨우 보존하려는 둔중한 미련함으로 치부하곤 했다.’
한수의 아내도 한수의 말에 끌렸다.
‘....제 기분을 늘 살피고, 근사한 문장으로 제 마음을 표현해주는 게 참 좋았어요.’
영희가 특별히 ‘말’에 민감한 것은 글쓰기 수업 강사로서 수강생들에게 글쓰기를 독려하는 입장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소리조차 어떤 숨겨진 의도로 이해하는 점이야말로 자신의 영리함이라 믿고’ 있는 영희에게 ‘말’은 상대를 파악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자기의 애인이 유서로 남긴 단 한 문장,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영희는 다음처럼 말 할 수 있다.‘
영희는 성호다운 유서라고 생각했다. 성호는 한때 영희의 연인이었다. 성호는 연애편지에 다른 시인과 철학자의 멋진 문장으로 영희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다. 영희는 너무 멋진 문장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사랑해. 단 세 말만 정확하게 말했어도 영희는 이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성호의 문장은 언제나 혼자 서지 못했다. (......) 그는 문장에도 목발을 썼던 게다. 영희는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문장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생각한다.’
어머니가 말에게 각설탕을 먹였다는 한수의 조작된 기억은 오랫동안 영희의 기억이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馬)은 소설의 전체적인 모티브인 말(言)과 동음이의로서 일종의 언어유희라 할 만하다.
‘자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마부가 모는 말이 도시의 도로에서 수레를 끌고 다니곤 했네. (......) 주로 짐을 배달하던 일을 하던 말이 집앞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얼른 뛰어나와 손바닥에 하얀 각설탕을 몇 개 얹어 말에게건네셨지. 각설탕을 낼름 잘도 삼키던 말의 긴 혀가 기억나는구만. 무엇보다 아버지한테 기죽어 사느라 자식새끼들에게조차 애정 표시를 잘 못하던 분이 그깟 말 새끼한테는 아낌없이 각설탕을 먹이던 모습이 더 잊히질 않네. (....) 나는 알코올이 물에 녹은 각설탕처럼 느껴지곤 하네.’
‘귀하디 귀한’ 각설탕을 먹일 만큼 어머니에게 말(馬)은 소중한 존재였고, 알코올중독자인 오빠에게서 유일하게 갖고 싶은 것인 말(言)은 영희에게 각별한 소통과 이해의 수단이다. 작가는 이에 더하여 이라는 은유를 오빠에게 적용하고 있다. 물에 녹은 각설탕은 오빠에게는 알코올 같은 것이기도 하다.
2.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2023년)
35살 그는 1997년 IMF 때 공장 폐업 후 고향으로 ‘기어 들어와’, ‘아들이 겪은 실패마저 맹목적으로 이해하려 한’ 아버지와 함께 기거하며 저수지 낚시로 소일한다.
‘저수지에 낚싯대만 드리우고 세월을 탕진하는 아들 대신에 아버지는 부지런히 논밭을 일구었다.’
‘아버지는 논으로, 그는 저수지로, 둘 다 진흙소처럼, 아버지는 논의 흙바닥에서 허물어지고, 그는 저수지의 물에서 녹아가고 있었다. 매일 죽고 싶었지만 살았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그의 곁에서 평생 머물러주었던 아버지보다 하루만 더 살겠다는 마음으로.’
‘사내는 자신을 끌어안아 주는 적막한 어둠 속에서만 편하게 숨을 토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뉴스도 보지 않고, 세상과의 소통도 끊고,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
’전 재산을 아들 사업에 쏟아부었던 아버지, 사업이 망한 것을 지켜만 본 누이들과 ‘남편의 애틋한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병든 엄마’가 그의 가족 구성원들이다.
아버지와 그의 관계는 다음처럼 설명되고 있다.
‘둘은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견디고 있는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럴 거라고 믿었다. 교만하고 느슨한 이해. 더 비싸게 값을 치르게 될 이기적인 속임수.
’아버지의 맹목적인 아들 사랑의 비극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중간엔 ‘온전치 못한, 성치 못한’ 한재댁 손주의 주검도 비극적인 삽화로 들어있다.
‘시골 전원의 고즈넉한 풍경의 비주얼 뒤엔 늘 어둠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음을 집성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농기구가 팽개쳐 있는 창고를 비우고 헐었다. 그는 창고 구석에서 낡고 삭은 붉은 찌통을 발견했다. 아이의 사체가 발견된 포인트 옆에 놓였던 붉은 찌통, 왜 아버지는 창고 구석으로 옮겨놓으셨는가. 굳이.... 아버지는 자폐적이고도 자멸적으로 겨우겨우 버티며 살고 있는 아들이 어느 한 순간 사람을 죽일수도 있다고, 그 많은 시간으로도 순치될 수 없는 분노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느닷없이 나타나 낚시를 방해하는 아이를 저수지로 밀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걸까. 범인을 탐문하고 다니던 그때, 혹여 아들이 용의자에 오를 수 있기에 미심쩍은 증거물들을 손수 없애버리려 하신 걸까. 그를 가장 위험하게 생각한 사람은 아버지였을지도. 어쩌면.
’갑자기 그가 아이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서늘한 대목이다. 물론 그는 낚시 중에 ‘방죽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물에서 거칠게 자맥질하는 소리를 들었노라고 아버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무신경함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그는 사업 실패 이후 또 다른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된다.
‘사업도 관계도, 건강도 파산, 공장 차려 사업한답시고 동분서주한 탓에 결혼을 안 한것은 그나마 다행, 힘들 때면 독한 알코올 취기로 고통을 감추는 고질병이 도졌다.’
’친구의 권유로 야학 선생을 하게 되고 거기서 25살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금강산에 있다는 ‘미인송’을 찍고 싶어 하는 여자 친구와 금강산 관광을 하게 되고, 여자친구는 소형 카메라로 관광지에서 꽃과 식물들을 찍다가 북한 초병에게 불려 가 5시간 동안 억류되었다가 풀려난다. ‘숲 속에 은닉해 있던 초소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 그녀를 식물 찍기를 좋아하는 관광객으로 위장한 남한공작원으로 규정한 것.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한다.
‘누가 그때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참 열심히 기다렸다고 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날 그곳은 기다림이 답이었다는 믿음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됐다고’.
여자 친구는 관광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 카메라를 두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 역시 결핍의 캐릭터다. 엄마는 가출하고, 가난한 시골 목사인 아버지 교회의 유일한 한 명의 신도였던 그녀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16살부터 가장 역할을 하며 파출부로 일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왔다. 영어가 자신을 세상 밖 지붕 위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인 유일한 사다리라고 여기면서.
‘문맹. 나중에야 그는 그녀와 끝내 같이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문맹에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맺어본 적도,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춰서 인정을 받아본 적도, 상급 학교를 다녀본 적도, 친구나 지인들과 내밀하고 정교한 우정과 다면적인 관계를 맺어 본 적도 없기에 어떤 사태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는 문맹이라고. 야학에서 배운 영어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어쩌면 세상에 대한 문맹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아버지의 죽음과 애인의 증발로 그는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그가 지켜주고 함께해 줘야 만 했던, 친애하는 존재들이 사라졌다. 그들이 없어지자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걸, 그는 뒤늦게 안다. 그는 자신마저 자신의 곁을 스쳐가고 떠나는 걸 가만히 놔둔다.’
3.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 (2015년)
우물이라는 공간은 마을 공동체가 모여 일상을 공유하는 곳이며, 소통의 공간이다. 무엇보다도 ‘마을 공동체의 청정한 시원(始原)’이 있는 곳이다.
‘사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 없어서 그의 뒤를 파내고 행적을 낱낱이 추적하라고 흥신소에 의뢰하고픈 마음마저 들 때가 있었다. (....) 그저 어떤 공간, 어떤 냄새, 어떤 기미, 어떤 맛에서 그는 자신이 가끔 존재한다는 걸 깨달을 뿐이다.’
10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을 가진 누이. 암으로 죽기 직전, 어머니는 사십 년 전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고는 헛말을 내뱉는다.
40년 전 이장댁 아들이 자신이 우물에 비누를 집어넣고는 지적 장애를 가진 소년의누이가 우물에 비누를 빠뜨린 것처럼 ‘우물 비누 사건을 조작’해서 일으킨 소동이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이혼과 사별과 혼외정사를 거침없이 감행하는 여자, 바보를 포함한 새끼 셋을 혼자 키우는 여자, 무엇보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여자’였다.
‘공모하듯이 둥글게 모여서 개처럼 두들겨 맞고 험악하게 때리는 두 모녀의 모습을아낙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바라보았다.’
‘허리를 살짝 굽힌 채로 그녀는 쌀을 한 되씩 푸듯 쪽박으로 진중하게 우물물을 밖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푸성귀를 씻거나 빨래를 할 때면 서로서로 우물물을 퍼주던 인심이나 호의 따위는 없었다. 네 어미가 하는 일에 너도 거들라며 슬쩍 어린 소년의 등을 슬쩍 밀어주는 아낙도 없었다. 응당 져야 할 책임, 마땅한 응징, 홀로 견뎌야 하는 징벌임을 어머니도 동네 아낙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듯한 분위기였다.’
소년은 우물에 비누를 빠뜨린 것은 이장댁 아들 용식이의 짓임을 알고도 누이를 바보라 부르며 혹독한 매를 든 어머니에게 왜 그랬냐고 다구친다.“
느이 누나가 내 손에 맞는 꼴을 봐야 마을 사람들이 말이 없으니까. 네가 그것을 아냐? 에미손에 느이 누나가 개 맞듯이 맞는 꼴을 봐야 느이 누나가 시암엘 내일이라도 당장에 나갈 수있으니까. 느이 누나는 바보라서 학교도 못 다니고, 나가서 숨 쉴 데라곤 시암밖에 없는데, 네가 그것을 아냐? 모르냐?”
이 슬프고도 잔인한 우물 비누 사건은 사내에게 오래 오래 큰 외상으로 남아 수시로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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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에게는 상대를 신경 쓰지 않는, 관계를 농담이나 유머처럼 여기며 한 사람에게 매인다는 것을 끔찍한 형벌로 생각하는 여자 친구가 있다.
’간절하게 매달리는 남자를 찾아서, 끝내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을 미끈한 비누처럼구는‘ 여자가 만난 지 1년 만에 다시 나타났지만 사내 역시 그녀를 잡지 않는다.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짐승의 헐떡임, 짐승의 핢아댐, 짐승의 껄떡임 같은 사랑을 받았다. 인생에서 단 한 사람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을 받은 사내는 ‘매번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사랑의 결핍과 불만족과 슬픔과 허기’를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너는 나와 있을 때만 행복할 거야. 너는 나 아닌 여자에게서 진정으로 밀착된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없어.’ 이와같은 어머니의 일방향성 사랑은 되갚을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사랑이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나가는 말
내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 되갚을 길 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다시 사랑할 수 없다. 희망이나 출구 없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친 삶의 언어화 작업은 작가의 몫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들뜬 몸종’이라 했지만.
*인용문은 밑줄로 표기함.
* 밑줄 친 문장들 모아보기
<2023년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 지루했던 마을에 잠깐 넘쳤던 스릴은 저수지 수면 위를 뛰어다니는 소금쟁이가 일으킨 파문보다 약했다.
- 사랑이 활짝 열린 문(door)으로 꽉 차게 들어오고 있었다.
- 심장으로 드라이아이스를 움켜 쥔 것만 같은 뜨거운 작열감
- 그날 추석의 만월처럼 기억이 환하게, 뚱뚱하게 돌아온다.
<2015년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
-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는 가짜 미소나 의미 없는 농담 같은, 3월 눈발처럼, 그녀와의 이별과 만남도 그랬다.
- 두서없는 생각이 3월의 더러운 눈 위로 푹푹 쏟아지고 있었다.
- 어머니의 부드러운 혀에 손톱 밑의 살이 간질간질 닿으면 배꼽이 움찔움찔했었다.
- 그녀의 표정은 빈 우물처럼 텅 비어 있었다.
- 소년은 잔모래의 중심부에서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맑은 물이 새롭게 벌컥벌컥 솟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어머니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그들만의 다정함은 수상쩍었다. 소년은 해질녘 공기가 그토록 비리다는 걸 처음 알았다.
- 뱀처럼 제 허물을 털어내듯이 생떼를 입힌 어머니의 무덤을 비가 스르륵 지나갔다.
- 산꼭대기 바위가 낙타의 혹처럼 봉긋 솟아난 것을 사내는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생에서 받은 상처, 세월에 할퀴고, 남자들에게서 보호받지 못한 생채기가 혹처럼 솟아오른 듯 보였다.
<2021년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뭔가 밀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 영희는 라푼젤이 ‘들상추’라는 뜻의 독일어라고 일러주며 강사로서 위신을 세웠다.
- 어머니가 말에게 각설탕을 먹였다는 한수의 조작된 기억은 오랫동안 영희의 기억이기도 했다.
- 중독자들이 술을 끊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운 걸 더는 참을 수 없기 때문이지 미치광이가 될까 봐, 간경화에 걸릴까 봐, 죽을까 봐 술을 끊는 사람은 없노라고 한수는 영희에게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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