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순하나, 뉴욕 어학원에 입학하다
뉴욕 맨해튼의 한 어학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거리로 나섭니다. 그 사이에 배우 문희경이 있어요. 1965년생, 올해 만 예순하나인 그는 지금 뉴욕에서 한 달짜리 어학연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SNS에 한 달 동안 지낼 기숙사부터 공개했어요. 욕실이 딸린 1인실이었죠. 만만치 않은 뉴욕 물가에 웃으며 한탄하면서도, 한국의 60대 아줌마이자 배우로서 주위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당당하게 적어 많은 응원을 받았어요. 최근 현지 일상도 전했는데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어학원 친구들과 함께 허드슨 야드의 베슬과 하이라인 공원을 누비는 모습이었어요. 편안한 옷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모습은 영락없는 학생이었죠. 그는 "서울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하다니"라며 벅찬 마음을 전했어요.


드라마와 영화, 예능을 오가며 오랫동안 '배우 문희경'으로 살아온 그에게 뉴욕에서의 한 달은 직함을 내려놓고 다시 학생이 되는 시간이에요. 관광지를 찍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한 도시에 머물며 배우고 생활하는 여행. 문희경의 뉴욕 한 달은 지금 중장년의 해외여행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중년의 어학연수가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불과 지난해예요. 2025년 JTBC 예능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에서 성동일, 김광규, 엄기준, 장혁, 신승환 등 평균 나이 52.8세의 배우 다섯 명이 영국 케임브리지 어학원에 입학했죠.
그사이 이런 장면은 연예인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어요. 글로벌 어학교육 기업 EF의 'Lifelong Learning Trend Report 2026'에 따르면 50세 이상 어학연수 과정 등록자는 최근 2년 새 50% 늘었습니다. 4050의 해외행이 '보러 가는 여행'에서 '살아보고 배우러 가는 체류'로 바뀌고 있어요.

왜 지금, 왜 멀리 떠날까?
가장 큰 이유는 퇴직 후에도 일하며 살아야 할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에요. 한국교육개발원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는 주된 일자리에서 평균 49.3세에 물러나지만, 일하고 싶은 나이는 70세입니다. 주된 일자리를 떠난 뒤에도 20년 가까이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다시 배우는 중장년이 늘고 있어요.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국내 대학의 50세 이상 성인학습자는 6만 명을 넘어 5년 전의 약 2.6배가 됐습니다.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집계로는 올해 전문대 신입생 가운데 50세 이상은 1만 8천여 명으로, 2022년보다 90% 넘게 늘었어요.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배움이 쉽게 시작되진 않아요. 40대의 하루는 회의와 마감, 아이 학원 픽업과 부모님 병원 일정으로 이미 빈틈이 없기 일쑤죠. 퇴근 후 온라인 강의를 켜도 몇 주를 넘기기 어려운 이유예요. 한국교육개발원 조사에서 중장년 학습자의 46.9%가 커리어 전환 준비가 부족하다고 답한 것도 이런 현실과 맞닿아 있어요.
해외 체류는 이 틈을 통째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아예 환경을 바꿔 이 문제를 푸는 거죠. 낯선 도시에서 나를 팀장님이나 엄마, 아빠로 부르는 사람이 없어요. 하루 일정도 수업과 생활로 단순해지고요. 오전에 배운 문장을 오후 카페에서 주문할 때 써보고, 틀리면 고쳐가며 익히게 되죠. 익숙한 역할에서 벗어나 다시 초보가 되어보는 경험, 그 자체가 중장년을 멀리 떠나게 하는 이유예요.
살아보기, 일하며 머물기, 배워보기
최근 보도와 조사를 살펴보면, 해외로 떠나는 중장년에게서 크게 세 가지 흐름이 눈에 띄어요. 한 도시에 머물며 현지 생활을 해보는 '살아보기', 일과 휴가를 함께하는 '일하며 머물기', 그리고 수업을 들으며 지내는 '배워보기'예요. 물론 이 셋이 딱 나뉘는 건 아니어서, 한 사람의 여정 안에 여러 모습이 섞이기도 해요.

살아보기
살아보기는 한 달 살기의 기본형이에요. 관광지를 바쁘게 도는 대신 한 도시에 숙소를 잡고, 그 동네 사람처럼 지내보는 거죠. 이미 2020년 라이나전성기재단이 「여행 말고 한 달 살기, 당신도 준비 중인가요?」로 49세 이상 500명에게 물었을 때도, 10명 중 2명 이상이 장기간 살아보는 여행을 다녀왔다고 답했어요. 최근에는 처음 해보는 중장년도 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현지 생활 지원을 묶은 상품도 나왔어요.


일본 규슈 남쪽의 소도시 가고시마가 그런 곳 중 하나로 인기를 끌고 있어요. 한 국내 여행사가 2025년 9월 가고시마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올해 8월까지 50팀 넘게 다녀갔고 주 이용자는 50~60대였어요. 운영사가 이 도시를 고른 이유는 너무 크지 않은 도시 규모, 비교적 따뜻한 겨울, 가까운 병원과 골프장이었다고 해요. 며칠 관광할 때와 달리 몇 주를 지내려면 날씨와 생활 여건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죠.
숙소도 번화가가 아니라 걸어서 마트와 트램역, 온천에 갈 수 있는 주택가에 있어요. 체류자들은 이틀에 한 번꼴로 마트에서 장을 봐 직접 밥을 해 먹었습니다. 첫날엔 번역기를 켜고 손짓을 섞어 메뉴를 주문했지만, 며칠 지나자 자주 보던 글자가 눈에 익었다고 해요. 한국에선 매일 아침 뉴스부터 틀던 한 체류자는 그곳에서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했어요. 장소만 바꿨을 뿐인데 오래된 습관이 달라진 거예요.
일하며 머물기(워케이션형)
일하며 머물기(워케이션형)는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합친 워케이션처럼, 일과 체류를 함께 하는 방식이에요. 40대에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로 떠오르고 있죠. 회사에서 한 달 휴가를 내기란 쉽지 않죠. 그렇다면 체류지를 '일하는 곳'으로도 쓰면 됩니다. 낮에는 노트북으로 한국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 후와 주말에는 동네를 걷고 현지 체험을 즐기는 방식이에요.

앞의 가고시마 숙소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였어요. 한 체류자는 넓은 공용공간 한쪽을 자신의 업무 공간처럼 쓰며 일과 체류를 병행했습니다. 같은 집에 머물러도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펼쳤죠. 모든 일정을 함께하지 않아도 되는 장기 체류라서 가능한 풍경이에요. 긴 휴가가 어려운 40~50대라면 이렇게 일과 쉼을 섞는 방식으로 첫 체류를 시작해볼 수 있습니다.
배워보기
배워보기는 최근 가장 빠르게 커지는 흐름이에요. 어학연수라고 하면 대학생의 방학을 떠올리기 쉽지만, 해외 어학원의 교실 풍경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국제 어학연수 시장에는 연령 구분 없는 일반 과정 외에 '40+', '50+' 같은 중장년 전용 상품군이 따로 생겼을 정도예요. 글로벌 어학교육 기업 EF는 50세 이상 과정을 2주부터 최대 52주까지 운영하고, 로마 캠퍼스에서는 매달 첫째 주 월요일마다 50세 이상 학습자의 새 기수가 시작돼요.
수업 구성도 젊은 층과 달라요. 오전엔 수준별 회화와 문법을 배우고, 오후엔 도시 탐방이나 요리·예술 활동에 참여하며 또래와 어울립니다. 시험 점수보다 현지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말, 그리고 함께 배우는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느슨하게 배우는 것도 아니에요. 50세 이상 학습자가 가장 많이 고르는 과정은 가벼운 체험반이 아니라 주 32레슨의 집중반이랍니다.
국내에서도 이런 상품이 나오고 있어요. 올해 7월 출발 일정으로 참가자를 모집한 한 50·60대 대상 프로그램은 영국 런던과 케임브리지에서 문화 체험을 한 뒤, 아일랜드 더블린의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현지 생활과 실생활 영어를 익히도록 짜였습니다. 유럽의 50~60대 참가자들과 교류하는 일정도 포함됐어요.

미국·유럽에선 이미 익숙한 '배우러 떠나는 여행'
'배우기 위해 떠난다'는 흐름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중장년이 배우기 위해 길을 나서는 모습은 미국과 유럽에선 오래된 풍경이에요. 1970년대에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표적인 두 모델을 소개해요.
미국 '로드 스칼라(Road Scholar)'는 1975년 '엘더호스텔(Elderhostel)'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비영리 교육여행 기관이에요. 대학 캠퍼스에 머물며 강의를 듣는 프로그램으로 출발해, 2010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현지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역사 현장과 자연을 직접 찾아가는 방식으로, 지금은 미국 전역과 100여 개국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해마다 10만 명 넘는 사람이 참여하고 있어요.


유럽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 제3기 인생대학)' 는 일과 자녀 양육을 마친 뒤의 삶을 '제3기'로 보고, 이 시기의 배움을 돕는 모임이에요. 1972년 프랑스 툴루즈대학교에서 시작됐는데, 1980년대 초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성격이 달라졌어요. 대학 강의를 듣는 대신 회원들이 서로 선생님이자 학생이 되는 방식이 자리 잡았죠. 회비를 적게 받고, 운영도 회원들이 스스로 맡아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여가나 오락 위주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철학·과학·테크놀러지·예술 등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며 은퇴 후에도 지적·정신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방식은 달라도 두 모델이 보여주는 건 같아요. 배움에는 나이 제한이 없고, 함께 배우는 사람이 생기면 일상의 반경도 넓어진다는 것이죠.
몇 주씩 머무는 여행은 며칠 짜리 관광과 준비하는 법부터 달라요. 어디를 둘러볼지 보다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를 먼저 그려봐야 하죠.

어디를 볼까보다,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가
다시 뉴욕의 문희경 씨를 떠올려볼까요? 오랫동안 '배우'로 살아온 그가 그곳에선 어학원에 다니며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학생'이에요. 해외 체류가 중장년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 이런 역할의 전환일 거예요. 낯선 곳에서 다시 초보가 되어 하나씩 해내는 경험은, 인생 후반도 얼마든지 새로 짜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지니까요.
그러니 이번 여행을 계획할 땐 체크리스트에 앞서 질문 하나를 먼저 던져보세요. '거기서 나는 어떤 하루를 살아보고 싶은가.'
아직 떠날 준비가 안 됐다면, 가까운 곳에서 먼저 연습해도 좋아요. 동네 도서관의 외국어 강좌나 온라인 회화 수업으로 배움의 리듬부터 되찾아보는 거예요. 언젠가 떠날 그 도시에서 건넬 첫 문장을, 오늘부터 연습해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