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했다. 얻은 것이 있다면 집에 머무는 시간과 함께 보내는 기회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아침마다 식탁에 마주 앉는 시간은 길어졌지만 대화는 늘어나기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대화의 소재도 빈곤하다. 연예인 이야기와 남 헐뜯기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각자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만 들여다보며 따로 무언가를 한다. 서로를 피하는 것은 아닌데 어딘가 어색하다.


일본에서는 퇴직한 남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아내가 겪는 스트레스를 가리켜 '남편 재택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하루 세 끼 집밥을 챙겨 먹는 남편을 가리켜 '삼식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어온 형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인생 후반부는 사랑이 실종되는 시기일까, 사랑을 다시 배워야 하는 시기일까?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특정한 형식의 사랑이다. 이뤄지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잃어버리면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감정의 롤러코스터.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 여겼다. 그 형식의 사랑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서사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 만남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감정을 겪었고, 그 열정이 결실을 맺을 수 없음을 알아챈 순간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이 세상에서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은, 가장 낭만적인 연인의 원형이다. 


오늘날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린다.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를 거치며 이 작품은 비극적이고 순수한 사랑의 대표적인 서사로 널리 수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하나를 넘어, 낭만적 사랑 자체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현대의 대중문화가 사랑을 재현하는 방식은 종종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을 중심에 두고, 빼어난 외모와 젊음, 강렬한 열정을 그 사랑의 조건처럼 제시한다.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인생에서 사랑이란 더 이상 누릴 수 없느 것으로 여겨진다. 정말 그런 것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고 한 때의 추억으로만 돌려야 한다는 뜻일까? 사랑과 나이 듦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감정일까?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달처럼 변하는 것에 맹세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말은 낭만적 사랑의 역설을 정확히 찌른다. 영원할 것처럼 맹세하는 사랑이야말로 감정의 변화에 가장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랑에 맹세하도록 배워왔다. 열정이 식으면 사랑이 끝난 것이고, 설렘이 사라지면 관계가 죽은 것이라고.





"오, 둥근 궤도 안에서 한 달 내낸 변하는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진 마세요"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1956)에서 이 문제를 다른 언어로 다룬다. 프롬이 보기에 현대인은 사랑을 '능력'이 아니라 '감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오류를 범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배워야 하는 능력이며, 연습해야 하는 기술이다. 


인생 후반부의 낯섦은 바로 그 맹세가 흔들리는 순간에 찾아온다. 직장과 육아와 일상의 분주함이 잦아들고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의 실재와 마주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사랑해 온 대상은 실제의 그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투사해 온 이미지였을까.


프롬에게 사랑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과 책임, 존중과 앎을 아우르는 능동적인 역량이다. 상대방을 소유하거나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뜯어고치려 하기보다, 온전한 타인으로 인정하면서도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힘이다. 그렇다면 인생 후반부의 사랑은 에로스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비중이 달라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대화와 돌봄, 동반의 중요성이 커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섹슈얼리티나 열정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의 형식만이 사랑 전체를 독점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은 안식처가 아니라 움직이고, 성장하고,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은 상대방을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완성하는 일이 아니다. 독립된 타인으로 온전히 존중하면서 끊임없이 알아가는 일이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 실제의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사랑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욕망과 대화, 돌봄과 독립성을 두루 품어 안는 한 층 더 성숙하고 복합적인 관계로 진화하는 것이다.


은퇴 후 식탁에서 마주한 배우자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결코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오랫동안 서로를 설렘과 열정이라는 낭만적 문법으로만 소비해 왔다는 방증일 수 있다. 줄리엣의 통찰처럼, 변하는 달에 기대는 맹세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프롬의 말처럼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능력이다. 능력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인생 후반부는 사랑이 저무는 시간이 아니다. 내가 만든 환상과 실제 타인의 실재를 구별하고, 그 차이를 묵묵히 견디며 상대를 비로소 다시 알아가는 성숙한 사랑을 배워갈 수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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